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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우물만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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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glows-ee-uhn]
: characterized by or given to extreme optimism, esp. in the face of unrelieved hardship or adversity.
지나치게 낙천적인
*볼테르의 "Candid" 중 Pangloss 교사의 낙천적인 성격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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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 : 토끼 / 이정록
 Moon 
| 2012·07·22 10:37 | HIT : 1,637 | VOTE : 196
토끼 / 이정록

  열 살이 되었을 때 처녀 선생님한테 토끼 한 마리를 선물받았다 그날부터 세상의 모든 초록은 토끼가 먹을 수 있는 풀과 먹을 수 없는 이파리로 나누어졌다.

  열여섯 살 때 토끼보다도 하얀 첫사랑이 왔다. 이 년 동안 그가 오는 길목을 올무처럼 서성거렸다 다시는 만날 수 없던 토끼 한 마리가 내 풀밭을 다 망쳐놓았다 그때부터 세상의 모든 여자는 보랏빛 교복과 토끼를 닮지 않은 여자로 나누어졌다 내 마음은 토끼 한 마리 잘 품을 수 있는 토끼장이 되길 바랐다 녹이 슨 철망 안에 내가 갇혀버렸다

  열여덞 살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사이사이 산토끼도 만났고 집토끼도 품고 다녔다 세상의 모든 초록은 먹을 수 있는 푸성귀라는 것을 알았다 약초와 독초가 하나라는 것을, 간혹 따귀도 얻어맞았다

  스물여섯 살 봄, 우리는 동갑이었다 웨딩마치를 울리며 내가 토끼장이 되었을 때 내 토끼장은 그녀의 토끼장 안에 들어 있었다 두 토끼장 사이로 어린 새끼 토끼들이 뛰어다녔다 풀뿐만 아니라 생 라면도 부숴 먹고 송장칡뿌리도 씹어먹었다 연탄가스를 마시기도 했다 그간 결혼식 사진을 모조리 찢어버린 적이 한 번, 집안 유리창을 몽땅 박살낸 적이 한 번, 전동 타자기를 방바닥에 메다꽂은 적이 네 번, 상패와 기념패가 소나기 쏟아지는 창밖으로 두 번 외출을 했다 때때로 새끼토끼들은 자는 척할 줄도 알고 늑대와 여우의 품을 파고들 줄도 안다 서서히 풀과 나무들이 땔감으로 보이고 그 옛날의 눈부신 토끼는 잘 저며진 토끼탕으로 보였다 세상은 이제 안주 될 만한 것과 안주도 되지 못하는 잡고기로 나누어졌다

  올해 나는 서른일곱이 되었다 이제 나는 무엇과 무엇으로 딱히 가르지 않는다 덤덤해졌다 내 아랫배처럼 두루뭉실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두 아이의 이름이 섞이고 어머니와 아내가 섞이고 새끼토끼들의 고모와 이모가 섞이고 풀과 나무와 땔감이 섞이고 귀여운 토끼와 토끼탕이 섞여 토끼장의 안팎도 없어졌다 깊은 밤, 홀로 깡술을 마실 때가 늘어났으니 박제된 토끼가죽 속에서 지푸라기를 꺼내 오래도록 씹을 뿐이다 이제 토끼도 지푸라기도 썩지 않는다 탈취제마저도 나와 한 몸이 되었다

  토끼풀을 한 번도 뜯은 적이 없는 나의 새끼 토끼 한 마리는 이제 열한 살이 되었고 또 한 마리는 일곱 살이 되었다

  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하얀 토끼 한 마리를 선물받았다 그 토끼가 떠나버린 뒤,
  세상의 모든 초록은 건초더미가 되어버렸다


출처: 이정록, <제비꽃 여인숙>, 민음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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